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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오 5세 교황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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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849회 작성일 10-04-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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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오 5세, pius 5

1572 잉글랜드 교황

축일 : 4월 30일

비오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리아 교외 보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귀족의 후손인데, 원래 이름은 안토니오 미카엘 지스리에리였다. 그는 14세 때에 도미니칸이 되었고, 1528년에 사제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 16년간 철학과 신학 교수를 재임했으며, 1556년에는 바오로 4세에 의하여 네피와 부트리의 부교로 임명되었다. 1557년에 추기경이 된 지슬리에리는 1566년에 비오 4세를 계승하여 교황에 등극하면서부터 트랜트 공의회의 칙서들을 실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새 교리서를 완성했고(1566년), 성무일도서를 개정했으며(1568년), 미사경본을 다시 펴냈고(1570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을 새로 발간케 하는 한편, 그를 교회 박사로 선언하였다. 그의 재임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와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1570년에는 잉글랜드의 엘리사벳 1세를 파문했다. 또한 그는 크리스챤 수도회의 일치를 도모하였으며, 크리스챤 국가들의 동맹을 호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1712년에 시성되었다.


<성 비오 5세 교황의 생애와 업적>

1. 생애(1504-1572)

교황 성 비오 5세는 1504년 1월 17일 북쪽 이탈리아의 보스꼬 마렌고(Bosco Marengo) 촌락에 있는 안토니오 기슬리에리 가문에서 출생하여 영세 때에 미카엘이라는 본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동경하여 부근의 도미니꼬회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5세로서 도미니꼬 수도회의 입회 허가를 얻어 더욱 면학과 기도, 고행 등 신심행사에도 더욱 주력하였다. 1528년 제노바에서 사제가 된 후 여러 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였다. 1550년 코모(Como)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코모는 스위스 국경 근처여서 이단자들이 많았다. 이후 종교 재판에 상당히 관여하였고 1556년 수트리(Sutri)와 네피(Nepi)의 주교, 1557년 3월 15일 추기경이 되어 1558년에 로마 교회의 이름 난 종교 재판총관이 되였다. 종교 재판을 완화시키고 정치와 외교적으로 기울어진 교황 비오 4세와는 불편한 관계였다. 교황의 서거 후 19일간 지속된 콘클라베에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수표를 얻었다.

그러나 교황이 된 비오 4세의 친척편애 통치하는 방법과 같이 일치 하지 못하니까 1559년에 신임을 얻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몬도비\"(Mondovi)의 주교좌로 옮겨 교구를 부흥시켰다. 그리고 1565년 12월 9일 비오 4세가 서거하자, 카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의 지지를 받아, 1566년 1월 7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우선 교황은 트렌트 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청을 수도원과 비슷하게 꾸미고 검소한 식사와 생활을 하였다. 족벌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도미니꼬회원이었던 조카 미켈레 보넬리(Michele Bonelli)를 추기경에 임명하여 국무 장관으로 삼았다. 교황은 종교 재판과 금서목록을 강화시켜 이단 근절에 힘쓰고 이탈리아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은 주교들의 정주(residentia)를 강조하여 장기 출타 시에는 사목직과 성직록을 박탈하기도 하였다. 수도원을 정비하고 후밀리아티(Humiliati)와 같은 수도원들은 폐쇄하였다. 신학교를 세우고 지방 종교회의를 열었으며 성직자들의 회의를 독려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밀라노에서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에 옮긴 카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이었다. 교황은 전례 갱신에도 노력하여 두 개의 업적을 남겼다. 1568년에 로마 성무일도와 1570년에 로마 미사 경본을 만들었다. 교황은 1567년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의 박사로 공포하고 1570년 성인의 전집 17권을 출판하며 불가타 성서의 새출판을 계획하였다. 이런 식으로 교황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해 로마 가톨릭 안에서 개혁(Counter-Reformation, 반종교 개혁)을 조직적으로 시행해 나갔다.

영국의 여왕 엘리사벳 1세를 1570년 2월 25일에 Regnans in excelsis(천상의 통치)라는 칙서로 파문하고 프랑스에서 위그노 파의 근절을 위하여 드 메디치의 가타리나를 지원하였다.

오스만투르크와의 대립에 있어서 교황은 유럽인들과 연합하여 유럽과 그리스도교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의 함대들이 고린토 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소위 1571년 10월 7일 레판토[Lepanto] 전투) 대승하였다. 이 승리를 로사리오 기도의 덕분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 승전을 기념하여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10월 첫 주일에 지내게 하였다(후에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되었음).

이듬해 봄에 비오 5세는 병을 얻어 1572년 5월 1일 세상을 하직하였다. 로마 시민은 그가 너무나 엄격한 인물이라는 소문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등극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서는 성인을 잃었다고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 1672년 5월 10일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고 1712년 5월 22일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축일 4월 30일.

2. 업적

비오 5세가 1566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1572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산산이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막중하고도 힘겨운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서방국가들은 부패와 종교개혁, 새로 생긴 군소 국가 사이의 치열한 싸움, 그리고 오스만투르크(터어키)의 침략 위협 등으로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1545년 전임 교황은 이러한 시급한 문제들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었다. 공의회에 모인 학자들은 18년에 걸쳐 토론하고 확인하고 단죄하는 작업을 통해 가톨릭이 취해야 할 행동방향을 결정했다. 그후 비오 5세는 교황좌에 오름과 동시에 공의회를 정착시키고, 공의회가 요구하는 철저한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사제를 올바르게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를 세우도록 했으며, 새로운 미사경본과 성무일도, 교리서 등을 발간하고, 청년들을 흡수하기 위해 크리스챤 교리위원회를 설립했다. 또한 교회 내의 부조리를 막기 위한 법 제정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밖에도 병원을 세워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도 하고 구제사업을 시행하기도 했으며, 정기적으로 돈을 주어 가난한 로마의 수도원에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개혁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의 반대에 부딪혔다.

비오 5세의 치하(治下)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하면 터어키(오스만 투르크)의 왕 세림 2세가 대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와 그 외 그리스도교의 여러 나라를 침범하여 온 사실일 것이다. 용감무쌍한 터어키 군 앞에는 대항하는 적이 없고, 전 유럽이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전 유럽이 단결할 것을 바라는 교황의 희망에 프랑스와 네덜란드간의 분쟁은 큰 장애요소였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유럽은 단일 함대를 조직하여 그러나 비오 5세는 매괴신공(로사리오 기도)을 친히 바치기도 하고 전 신자들에게도 기도를 바치도록 하였다, 적군을 레판토에서 맞아 싸우게 된 오스트리아의 태자 돈 요한은 1571년 10월 7일 기적적인 대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3. 신심과 수덕적 태도

교황의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그는 조금도 수도자로서의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를 되도록이면 간단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므로 교황청을 방문하는 자는 마치 수도원과 같은 감을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교황에 피선되자, 시민들은 전례대로 성대한 교황 취임식이 곧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시일이 경과해도 아무 소식이 없더니, 취임의 대식전은 중지되고 그의 경비는 모조리 빈민구제 및 경영 곤란한 수도원 원조의 목적에 기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민들은 모두 놀라는 동시에 새교황의 자선박애의 정신에 감탄하였다 한다. 그 외 비오 5세는 결코 교황의 복장을 새로 맞추지 않고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만족하며 때때로 모자없이 맨발로 로마의 성당을 순례하였다고 한다.

비오 5세의 등극(登極)은 마침 트렌트 공의회의 직후였었다. 그러므로 그는 수많은 주교들과 신학박사들이 그 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세밀히 실행하도록 하고, 종교개혁의 미명하에 전「유럽」의 종교계를 혼란 속에 빠지게 한 신 교파에 대항하기 위하여 우선 공교요리를 편찬하도록 하고, 1567년 이를 경향 각지에 배부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써 참된 성교(聖敎)의 쇄신과 혁신의 실적을 올려 교황청부터 주교, 다음은 사제, 수도자, 최후에 평신자 등의 순서대로 점차 신앙생활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악이라 불리우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처단하였다. 일요일에 노동하는 자는 주일을 모독하는 자로 단호 배격하고, 독성 모독 등의 대죄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이 엄벌을 가하였다. 비오 5세는 인간을 천사처럼 취급하고 그의 연약함을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도 실로 이 같은 점에 기인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의 선임자인 제교황들에게는 누구나 다소 친척을 등용하는 악폐(惡弊)가 있었으나 그는 깊이 이 점에 대해서 경계하였다.

독일의 세뻬르트 레프레르 두 박사의 편찬으로 되어있는 교황사(敎皇史)라는 서적에는 제1대의 교황 성베드로부터 제261대 교황 비오 11세까지의 초상화가 있는데, 그 중에는 화려한 교황의 모습을 갖춘 모상이 있기도 하고 오른손을 들어 강복을 주는 모상도 있는가 하면, 집필과, 설교하는 모습 등 가지가지로 되어 있으나, 성 비오 5세 교황은 장궤 합장한 태도로 그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당시의 로마 시민에게 비오 5세처럼 경건한 교황은 지금까지 본 일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한 그리스도교 제국을 침공해온 터어키의 왕 세림 2세에게,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의 무력에는 꼼짝도 안하지만 다만 저 교황의 기도의 힘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신앙이 깊고 열심한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도미니코 수도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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